의빈, 거둥고개, 효창공원, 문효세자 , 수빈박씨 , 순조 옷소매붉은끝동 16회 17회 | 승은상궁, 소용,
덕임과 김귀주의 사면으로 거래하는 자서전
근데 이 장면... 화빈이를 어이없게 우습게 보고 웃기 시작했어원작보다 훨씬 못한 중학생 화빈궁인은 왕의 침전에 들어가기 전에 옷을 갈아입은 임금 안전의 문제도 있었고, 00궁인과의 합방은 상궁이 사사로운 일로 지켜보지 않았기 때문에,꽃 모양의 망간 관자
승은을 입고 반오품 상의가 된 aka승은은은 상궁승은을 입으면 어쨌든 파격승진을 하는 것이다 궁녀 중에서는 정5품이 최고위계이기 때문에!(종4품부터는 후궁이다)
정조 때 승은만으로는 후궁에게 첩보를 내리지 않고 수교를 했다고 한다.특별상궁의 당의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란스럽지만 주인공이라 자수 보니까 한복 협찬업체에서 혼을 갈아치운 것처럼 상궁 당의 입고 색깔 있는 당의로 변하는 걸 보여줬으면 좋았을텐데 시간이 없었어ㅜㅜ궁녀의 개구리 첩이야!승은을 입고 덕임이 기거한 곳은 단청이 없는 별채라 그런지 조금 한적한 느낌이 든다.쿼르와는 거리가 먼 공간이라 아쉬웠다.낙선재는 그래도 쿼르 느낌이 드는데
잠옷 자수가 예뻐서16회에서 좋았던 장면.같은 내명부 여관이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그녀들아아 관례후에는 머리를 올린 다품계를 받던 나이의 정식 궁녀가 그렇게 머리를 한게 아니야 ㅋㅋㅋ 외출때도 더 기미같은 머리를 했을거야.이 장면은... 당의도 안 입고 첩도 없으니까 의빈이가 원하던 필부와의 사랑 같았다최종회1786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문효세자 사망, 김귀주 사망, 의빈 성씨 사망, 상계군 사망의빈은 아이를 낳고 정3품 소용첩을 받아 정식 후궁이 되었다!1784년 태자가 책봉된 뒤 정1품이 되었다.중희당 앞에 선 의빈*정조는 문효세자를 위해 중희당을 세웠다.당의는 차분하고 소박하고 예쁘지만 복자박이라거나 정석 당의가 한 번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문효세자는 1786년 5월 11일 미시에 창덕궁별당에서 훙거하였다.5월 3일 황태자가 홍역에 걸려 의약청을 설치했지만 이후 병증에서 차도가 없어져 의약청에서 숙직도 철수했다. 그러나 갑자기 증세가 악화돼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단청이 없는 별채의 모습이 대궐 밖처럼 자유롭게 보이기는커녕 무척 쓸쓸해 보인다.
실제 의빈들의 거처는 연화당 정조의 집무실인 선정전 바로 앞 동쪽에 있었다.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ㅎ정조는 연화당에서 집무를 보기도 했다.얼마나 좋으면...정조의 상복세자에 대한 정조의 상복은 국조의례 및 효장세자 때의 전례에 따라 재최기년으로 정했다.문효세자가 갓 태어난 가족의 모습이다 태자의 시호는 온효에서 문효로 고쳤다.
의빈은 문효세자가 임신하기 전 두 번의 유산을 하였다.그리고 세자를 잃기 전에 이미 두 번째 옹주를 잃었다.전혀 자식을 두지 못했어 (´;ω;`)더구나 문효세자의 장례식 때 의빈은 만삭이었다.ㅠㅠㅠㅠ 문효세자의 묘소는 도성에서 가까운 현효창공원이었다.1786년 윤7월 19일 발인.그리고 곧 의빈이 세상을 떠난 1786년 9월,의빈의 죽음은 의문사로 남아있다: 임신중독, 독살설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9월 14일 갑신 2번째 기사, 1786년 청나라 건륭 51년,
의빈성의 졸기.
의빈 성씨가 졸업하였다. 하교하는 것을 "상의예는 갑신년 194)의 예에 따라 뒷마당의 1등 예로써 거행하라"고 하였다. 처음 의빈이 임신했을 때 약방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 설치를 요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달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이 들어 졸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였으나 한없이 슬퍼하였고,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 온 나라의 소망은 여기에 달렸는데, 또 이렇게 되니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병이 이상했는데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앞으로 국사를 의지할 곳이 더욱 없어지게 됐다."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세가 좋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무슨 원인이 있는지 의심하였다고 한다.
의빈의 유품을 정리하는 경희와 복연이삼간택 장면용종을 낳은 의빈이 죽었을 때 중년이 넘은 정조에게 후사가 없어 비상시국이었다.정조 11년 동안 택령을 내려 세 번째 간택 후궁을 찾았는데, 순조와 숙선옹주의 생모인 수빈 박씨다(장남 박씨).세 번째 당의!의빈 정조에게 효의왕후와 반드시 후사를 잇도록 유언하였으나 효의왕후는 위태증상만 있을 뿐 후사는 할 수 없었다.불임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다'내 생각에 이 자리가 거론되는 것 같다'의 빈묘는 원래 문효세자묘와 함께 정조가 태어나기 전까지 자주 찾았다고 한다.임금이 자주 행차하여 교둥고개로 불린다
제조상궁이 된 경희1800년 정조의 승하 문효세자의 요절은 조선 역사를 바꾼 대사건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문효세자가 살아 있었다면 19세에 왕위에 올랐을 것이고, 친정이 충분히 가능한 나이다. 더구나 문효세자는 세자교육을 일찍 받았다.정조와 총명한 의빈의 아들이라 정조의 업적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의미 없는 집안이지만…의빈 사후 거의 열흘 정도는 실록이 없는 워커홀릭 정조가 정사를 모두 내려놓을 정도였다니 실록이 텅 비어 있어 이는 충격이었다.
<한중록>에 따르면 정조의 슬픔은 극에 달해 신하들이 유교의 도리를 언급할 때 의빈의 장례를 시작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고 한다.결국 위빈씨 사후 정조는 더 나아가 ㅇㅇ대부분의 업적이 이때 나온다.정약용원작이 나왔을 때는 위빈에 대한 사료가 부족해서 오히려 수빈 박 씨가 더 주목을 받았었는데... 작가님 너무 대단해서 소름 돋아.
드라마에서 공노비 해방 얘기가 잠깐 나왔지만 순조롭게 정조가 해야 할 일을 지킨 것은 공노비 해방(1801)뿐이다. ㅎ 이후 빠르게 벽파가 득세하면서 조선은 오히려 퇴행하기 시작한다.
잘 나갈 때 세력정치(반남 박씨, 안동 김씨)가 시작됐는데 이것이 수렴청정으로 빚어진 불가피한 상황이었을까.순조는 조선왕조에서 손꼽히는 재위 기간이 긴 왕이다. 더구나 정통성도 터무니없다. 그러나 순조는 친정을 할 때도 권력정치의 폐해를 조금도 바로잡지 못했다. 선왕이 죽기 직전까지 노력하여 이룩한 것을 유지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조선은 퇴행했다.바깥 세상은 급변하는데 조선의 힘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순조의 장자인 효명세자가 마지막 희망이었지만 효명세자까지 요절해 상황은 더 어려워진다. 이처럼 위빈과 문효세자의 죽음에서 파생된 생각들은 꼬리를 물고 나온다.그래서 더 슬픈 얘기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