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노동자들의 시골 생활...
시골 주택 뒤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뒷집은 비어 있었는데 어느 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시끄러워 뒷집을 둘러보니 캄보디아 인부들이 뒷집으로 이사 온 것이다.
캄보디아 인부들은 독자적으로 집을 빌려 이사 온 게 아니라 한국인 노무관리자가 시골 빈집을 찾아 합숙소로 쓰는 것 같았다. 나이는 2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다양했고 남녀가 섞여 있었다.그들은 아침 6시 반경 일제히 기상하여 합동버스로 일터로 나와 밤 6시 반, 어둠이 세상을 짙게 물들일 무렵에는 귀가한 직장은 농촌의 각종 현장이었다.
시골에 생활해 보니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서너 명 정도였지만 지금은 마을 주민의 평균연령이 75세를 훨씬 넘어 그나마 독거여성이 많았다. 서로 돕기는커녕 자신의 농사에도 역부족이었다. 이것이 외국인 근로자가 필요한 이유였다.하지만 농촌의 농사짓는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과거 가장 손이 많이 가고 일손이 많이 필요했던 벼농사는 요즘 가장 편리하고 손이 많이 가지 않는 농업이었다. 예전에는 모내기, 모내기, 거름, 논 잡초제거, 농약살포, 피빼기, 벼베기, 벼말리기, 단을 묶어 집으로 운송하고 탈곡하여 벼베기 등의 작업이 끝이 없었지만 요즘은 모든 작업을 농기구로 처리하여 대량의 작업이 가능하여 순식간에 많은 일량을 한 사람이 처리하였다.
그러나 밭농사는 달랐다. 특히 고구마의 수확은 기계가 고구마를 캐더라도 하나하나 고구마를 정리하여 적당한 포대에 담아 판매할 수 있도록 손질하는 것은 모두 일손이 필요한 일이었다. 외국인 근로자가 대거 투입되는 작업이었다. 채소나 고추 재배도 마찬가지였다.외국인 근로자들의 하루 노임이 최근 10만원 안팎이라지만 논둑과 풀베기 전문가들은 하루 17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농촌 일을 운영할 수 없는 실정인 것 같았다.
고향을 떠나 먼 타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하루 종일 힘든 일을 마치고 어두워야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짬을 내어 밖에 나가 고국의 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를 거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필자 역시 외국에서 25년간 생활했지만 느낌은 좀 달랐을 것이다. 회사가 현지에 투자해 당당히 현지에서 대접받으며 생활하는 것과 몸 하나로 힘든 노동을 하면서 가족만을 생각하는 마음은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국가의 힘이 국민의 지위를 결정하게 되는 것 같다. 우리도 670년대 어려운 시절에 서독의 광부 간호사로 일하며 중동 열사에서 노무자로 지냈던 그 시절의 꿈은 돈을 벌어 가족의 미래를 밝혀주겠다는 희망이었던 게 아닐까.우리 뒷집에 사는 캄보디아 인부들에게 희망의 박수를 보내면서 제발 노동을 많이 시키고, 돈을 횡령하는 악덕 업주를 만나지 않고, 열심히 일한 만큼 꼬박꼬박 보수를 받고, 그 돈으로 우리가 그래왔듯이 고국의 자녀들과 형제학교에도 보내고, 논과 밭을 구입해 한국에서 고생한 보람을 되찾기를 진심으로 바란다.